『개소리에 대하여』 맛보기


이 책 완전 얇고 쉬워요 ~ 읽어보세요.^^

『개소리에 대하여』[1]는 아주 얇은 책이다.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고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라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마 지하철이나 열차에서 읽기 좋은 미니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을 그런 식으로 얕잡아 봤다가는 큰 코 닥친다. 이 책은 절대로 쉬운 책이 아니다.

역시 형이야! 구하러 왔구나!

아무런 사전 설명도 없이 이 책은 대뜸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소리가 너무나도 만연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이가 이것을 알고 있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개소리를 하고 다니니까.

벌써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개가 아니다. 우리 문화라고 한다면 아마 서구권[2] 문화에서 저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특정 요소를 가리키는 것일 텐데 그게 무슨 요소인지 분명하지 않다. 근데 그걸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개소리를 한다고 한다. 도대체 개소리가 뭐길래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책 제목부터 『개소리에 대하여』니까 조금만 더 읽으면 알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아니, 나도 잡혔어...

그런데 저자도 분명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사전을 찾는다. 어떤 기본 전제를 딱 정해놓고 논리를 전개하며 진도를 차근차근 밟을 것 같았는데 사전을 찾고 있는 대목에서는, 논문이나 철학 서적의 엄정함보다 에세이 서적에서 볼 법한 상대적으로 가벼운 인간미가 느껴진다. 사전을 찾는 것이 분위기를 가볍게 환기시키기 위한 도구로만 기능하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저자는 이와 함께 체계적인 연구의 어려움 또한 토로한다.

내가 아는 한, 이 주제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된 바가 없다.

개소리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탐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개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를 분별할 수 있는 충분한 지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 자신이 개소리를 하는 것 또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이 그렇듯, 개소리라는 단어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고 현상 그 자체도 광범위하며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 바로 이런 문제들로 인해 일단 '개소리' 와 유사한 단어들의 정의를 찾는 것부터 개소리에 대한 저자의 탐구가 시작된다.

사전과 정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 책은 원래 미국 사람이 쓴 영어 책이다. 그래서 저자가 찾아보는 사전도 영영사전, 특히 옥스포드 영어사전이다. 다른 외국어에 대해서는 대응하는 외국어 단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찾지 않았다. 다만 내가 읽은 것은 한글번역판이기 때문에 역자의 번역이 충분히 믿을 만하다는 가정 하에 '개소리' 라는 단어가 원어 'Bullshit' 에 대응한다는 것을 새로운 전제로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3] 이후 이어지는 저자의 탐구 방식은 '개소리' 와 유사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의 정의와 용례를 분석하며 그 구성 요소 중 무엇이 '개소리' 와 어울리는지, 무엇이 '개소리' 와 다른지 확인하며 '개소리' 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조건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다.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저자가 이런 방법을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사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모르면 사전에서 뜻을 찾으면 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앞으로 살펴볼 내용을 통하여 언어의 의미는 그렇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개소리' 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사항들

'개소리'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저자는 몇 가지 자료를 검토한다.

협잡

저자는 우선 '협잡Humbug ' 이라는 단어에 대한 20세기 미국의 분석철학자 맥스 블랙Max Black의 정의[4]를 제시한다.

이에 대한 저자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비트겐슈타인

이제 조금 더 엄밀한 접근을 위해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전기 자료들을 살펴본다.

장인 정신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자료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모토로 롱펠로의 시구를 언급한 적이 있다.[5]

In the elder days of Art,
Builders wrought with greatest care
Each minute and unseen part;
For the Gods see everywhere.

더 오래전 예술의 시대에는,
건축가들이 최고의 세심함을 기울여 공들여 만들었지
매 순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신들이 모든 곳에 계셨으므로.

이 시구의 요점은, 옛 장인들은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특징들에 대해서조차 그들 자신의 양심으로 사려 깊은 자기 규율을 느슨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오늘날 광고와 홍보의 영역, 그리고 그와 밀접하게 연결된 정치의 영역은 세심히 공들여 만들어진 '개소리'들의 사례들로 가득하다. 분명 '개소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부 사항에 공을 들이지 않거나 태만한 것이 '개소리'의 본질적인 특징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Sick as a dog

"Sick as a dog"는 몸이 몹시 좋지 않은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자료에 의하면, 그의 러시아어 개인 교사 파니아 파스칼Fania Pascal이 그 말을 사용했을 때 그는 대번에 혐오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당신은 차에 치인 개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소"라고 대답했다. 저자는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개인 교사가 서로 잘 알던 사이였기 때문에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비트겐슈타인이 실제로 "Sick as a dog"이라는 그녀의 표현을 혐오스럽게 여겼다고 가정하며, 비트겐슈타인이 느낀 불쾌감의 핵심은 파스칼이 본인이 한 말이 옳은 건지 그른 건지 관심조차 없었다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저자가 생각하는 '개소리'의 본질,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분명해진다. 그것은 바로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다.

저자의 결론

이 외에도 불 세션bull session, 불bull, 그리고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실린 '개소리bullshit '의 여러가지 용례를 분석하며 '개소리'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추출한다.

그리고 '개소리'의 현상에 대해 저자는 이런 말을 남긴다.

그리하여 이 책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런 의심을 준다.

여기까지가 책에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곱씹어 볼 만한 모든 책이 그렇듯, 이 책의 또다른 핵심은 책 바깥에 있다.

문제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저자가 참/거짓에 대한 무관심을 개소리의 본질로 삼는 주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의문점이 있다. 개중에는 나름의 답이 나온 것들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이 훨씬 많다.

왜 우리는 거짓말보다 개소리에 관대한가?

저자에 의하면, 거짓말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허위성falsity, 즉 참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소리가 숨기는 것은 진실이 아닌 기획의도기 때문에 개소리가 꼭 거짓일 필요는 없으며, 이는 분명 개소리와 대비되는 거짓말 고유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개소리와 거짓말 모두 중요한 것을 고의로 숨겨 상대를 속이더라도 우리는 거짓말에 모욕을 느끼고 분노하지만, 개소리를 그렇게 대하지는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개소리는 거짓말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선택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거짓말은 종종 모욕감이나 분노를 일으키는 반면, 개소리에 대해서는 불쾌하거나 거슬린다는 표시로 어깨를 으쓱하면서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거짓말과 개소리를 대하는 우리의 반응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그 답이 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고찰에서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문법 규칙들은 우리가 훈련을 통해 배운 언어 사용의 규칙들로서, 그것들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언어 사용은 그것과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많은 실천적 활동의 질서를 어지럽힌다. 그렇기 때문에 문법 규칙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적으로 적용되어 확립되면, 다른 규칙들의 채택을 막는다. 그리고 이런 뜻에서 문법 규칙들은 비자의적인 면을 지닌다.

(중략)

규칙을 따르는 자로서 나는 언어놀이에서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219).

(중략)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놀이에서 이루어지는 규칙 따르기는 의사소통을 위해 배워 익히고 행하는 하나의 실천적 기술(技術)이다. 그것은 언어놀이라는 관습적 제도(문화)가 존재하는 가운데, 통상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숙달된다.[6]

앞서 등장한 질문에 대하여, 이 답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겠으나, 여기에는 그 답의 핵심이 되는 것이 있다 - 우리는 언어놀이를 통해 그렇게 배운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개소리에 죽일 듯이 달려들지 말 것을 배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배운 것인가? 개소리에 죽일 듯이 달려드는 것이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저 그것이 우리 문화의 일부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언행을 무책임하게 만든다.

'정확하게 아는 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한편 저자는 오늘날 개소리가 만연한 이유 중 하나로 다음과 같은 현상을 지목한다.

개소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도 말하기를 요구받는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할 기회나 의무들이 화자가 가진 그 주제와 관련된 사실에 대한 지식을 넘어설 때마다 개소리의 생산은 활발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실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획득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저자가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이는 이 문제가 인식론이 다루는 주제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 현 시점에서의 개인적인 결론이다. 인식론에 대해 개괄적인 이야기만 하더라도 책이 훨씬 두꺼워지고 내용 상의 주객전도가 발생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다만 그와 별개로 안다는 것, 그리고 사실에 대한 지식은 무엇이며 진술이 지식을 넘어서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에 대해 정답을 말하는 것은 언어의 월권이다. 그런 것들은 드러나지 말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정확하게 아는 것'이란 '객관적으로 이름과 실상이 들어맞는 것'에 가까울 것이라는 의견 뿐이며, 실상이 그런 한 이 모든 내용은 개소리에 대한 개소리다.

진정성의 모순

저자에 의하면, 오늘날 개소리가 만연한 또 하나의 이유는 회의주의에 기반한다.

회의주의는 우리가 객관적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신뢰할 만한 방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태의 진상이 어떠한지를 인식할 가능성을 부인한다.

(중략)

그러나 다른 어떤 것에 확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오류로 드러났다고 가정하면서도, 우리 자신만은 확정적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옳은 기술과 틀린 기술이 모두 가능하다고 상상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진정성sincerity 이라는 이념은 회의주의에 기반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암암리에 자기 자신은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하여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전념한다.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진정성 그 자체가 개소리다.

객관적 실재를 부정한다면 '나' 또한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고, '나'를 주장할 생각이라면 객관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회의주의를 밀고 가게 된다면 어떤 사태의 진상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 되며, 그로 인해 우리는 벙어리가 되거나 개소리만을 말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는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고(실상과 비슷하지 않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고쳐야 할 악습관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도전이 과연 어떤 성격의 것일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마 기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투쟁의 성격을 띨 것이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객관적인 실상을 밝힐 가능성을 부정하는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릴지도 모른다. 고치는 대상이 일반적인 것, 추상적인 것일 수록 개소리 신세를 면하기 어려운 탓에 진정성을 바꾸는 일은 구체적인 것에서,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 형태는 어떤 구체적인 언행을 직접적으로 찌르는 언쟁이자 우리가 현실에서 그토록 피하고자 하는 소란이다.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는 개소리를 막기 위하여 투쟁하려 하나 투쟁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성을 둘러싼 우리의 모순 아닐까?

결론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개소리라는 주제로 곱씹어볼 만한, 압축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아무리 우려도 국물 맛이 떨어지지 않는 사골과 같은 책이다. 도입부는 철학 에세이답지 않게 산뜻하지만 그 결말은 생각해볼 거리를 아주 많이 남긴다.

개소리의 핵심은 그 의도가 진리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소리란,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의 목적에 맞게 무엇이든 주워 담아 이리저리 엮는 것 - 실용적인 기만 - 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옮긴이의 글에서 드러나듯, 지금은 개소리의 시대다.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말하며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줄 모른다. 여기에는 나 또한 포함되니 부디 이 글을 깨닫기도 전에 버려야 할 사다리의 시제품처럼 생각해주길 바랄 따름이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나의 명제들을 딛고서—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7]


참고 자료


  1. 원제는 'On Bull____'. ↩︎

  2. 이 책의 저자인 해리 G. 프랭크퍼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출신의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다. 이 글에서 이후 그를 지칭하는 표현은 '그'나 '저자'로 통일한다. ↩︎

  3. 2016년에 이루어진 이 번역 이전에는 '헛소리', '빈말' 등의 번역이 있었는데, 옮긴이에 의하면 '헛소리' 는 '넌센스nonsense ' 와 차별화가 어려울 뿐더러, 무의미한 단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저자의 논지와 상충하기에 '개소리' 에 비해 적절한 번역은 아니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리 G.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이윤 옮김, pp. 70-77 참조. ↩︎

  4. 이때 블랙의 정의는 자기 자신이 제안한 형식적 정의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 정의와 본격적인 정의를 비롯한 협잡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그의 저서 『협잡의 만연The Prevalence of Humbug』 (1985) 를 참고. ↩︎

  5. 이 시구는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의 시 The Builders 에서 발췌한 것이다. ↩︎

  6. 이영철(2016),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책세상, 5. 규칙 따르기와 사적 언어. ↩︎

  7.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책세상, pp.128-129. ↩︎